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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년, 대학생의 이야기를 듣다… 제1화 그녀들의 수다
    정리=정치섭 기자 btip@mbus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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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7
  • 부산에 온 스페인 ‘MTA’와의 특별한 3일
    글‧사진=정서원 배움과 실천의 공동체 고치 이사정리=정치섭 기자 btip@mbusan.co.kr 정서원 배움과 실천의 공동체 고치 이사 “올라(Hola, 스페인어로 안녕)!”지난 2월 스페인의 ‘몬드라곤 팀 아카데미(Mondragon Team Academy, 이하 MTA)’ 학부생 10여명이 2박 3일 일정으로 부산에 있는 협동조합 ‘고치’를 찾았어요. 지속적으로 교류해 부산에서 함께 할 것들을 찾으려고 고치를 방문한 거죠. MTA는 몬드라곤 협동조합(Mondragon Corporation)의 교육 프로그램이예요. 전 세계 사회적 경제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몬드라곤 협동조합은 스페인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돼 세계 최대의 노동자 협동조합으로 성장했어요. 그러다가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와 2013년 협동조합의 역사인 ‘파고르(FAGOR)’ 전자 가전부문 파산을 거치며 인재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죠. 그 결과로 탄생한 게 MTA예요. MTA가 독특한 이유는 교육프로그램에 있어요. 철저히 실무 중심이죠. 교수 대신 ‘팀 코치(Team Preneur)’가 있고, 4년의 학부과정에서 학생들은 실제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회사를 설립해 세계를 무대로 수익을 내고 배분하는 일을 해요. 그런 측면에서 MTA가 부산의 협동조합 고치를 찾았다는 건 우리 단체의 입장에서는 큰 사건이었어요. MTA 한 관계자의 말이 떠올라요. 그는 “고치가 몬드라곤 협동조합의 설립자 호세 마리아 신부와 닮은 철학을 가지고 8년간 활동한 것에 큰 관심이 생겼다”며 “고치와 지속적으로 교류해 부산에서 함께 할 일들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고 했어요. 자, 이제부터 몬드라곤 협동조합과 MTA, 그들의 방문 계기, 그리고 고치에 대해 자세히 전할게요. 부산 부산진구 초읍동에 위치한 스페인 레스토랑 프린체. 사회적경제 심장, 몬드라곤 협동조합 기독교 성지(聖地)가 예루살렘이라면, 사회적 경제의 상징은 스페인 몬드라곤 협동조합이예요. 1941년 스페인의 작은 마을 몬드라곤(지명)에 부임한 호세 마리아 신부는 내전으로 폐허가 된 마을에서 젊은이들에게 협동정신과 기술을 가르쳤고, 1956년 5명의 젊은이와 함께 난로를 생산하는 노동자협동조합 ‘울고르(Ulgor)’를 설립했다고 해요. 몬드라곤은 세계 최대 노동자 협동조합으로 성장해 2009년까지 250여개 기업체에 약 8만5000명이 근무하는 거대한 연합체가 됐죠. 하지만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와 스페인 남부 부동산 거품 붕괴 여파로 2013년 몬드라곤과 역사를 함께 한 ‘파고르(FAGOR)’ 전자의 가전부문은 끝내 파산했죠. 파고르의 전신이 바로 울고르예요. 그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을 거예요. 몬드라곤 사람들은 위기를 극복할 동력으로 ‘참여와 연대, 혁신’을 내세웠어요. 동시에 자신들과 주변을 바꿀 혁신적인 역량을 갖춘 인재가 필요하다고 느꼈죠. MTA는 이 같은 흐름에서 2009년 탄생했어요.   학부과정에서 회사를 경영하다 앞서 말했지만, MTA의 학부과정은 독특해요. 우리가 경험한 걸 바탕으로 학교를 떠올리면, 교실이 있고 거기서 가르치는 선생님과 배우는 학생이 있잖아요? MTA는 교실과 선생님, 학생이 없어요. 대신 24시간 개방된 사무실이 있고, 15명 안팎의 학부생이 팀을 이뤄 전 세계를 무대로 여행하고 공동생활을 해요. 선생님을 대신해 팀 코치(Team Preneur)가 전 과정의 조력자 역할을 해요. 그들은 (교수가) 가르치지 않는데도 배우는 게 있다고 했어요. 이해가 되나요? 저는 일방적이고 주입식인 교육과는 다르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어요. MTA 학부생들은 팀을 꾸리고, 팀은 알아서 자금을 모으고 사업을 진행한다고 해요. 수익을 내고 이를 배분하는 등 아이디어 단계에서부터 생산, 마케팅, 판매, 세금계산서 발행까지 전 과정을 스스로 한다는 거죠. MTA 학부과정은 레인(LEINN)이라고 불러요. 리더십(Leadership),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 혁신(INNovation)의 약자인데 이들이 융합된 4년제 과정이죠. 학부생들은 팀 단위로 4년간 세계를 여행하며 현지 전문가, 기업가를 만나 상호작용해요. 실제 회사를 만들고 팀을 운영하며 고객을 만나 실전 비즈니스 프로젝트를 수행해요. 이 과정에서 학부생들은 스스로 배움을 만들어가는 창조적‧개방적 팀 기업가로 성장하는 거죠.   스페인 MTA 학부과정 학생이 지난 2월 21일 2박 3일 일정으로 협동조합 고치를 방문해 기념촬영하고 있다. 부산에 온 MTA 고치의 멤버인 고은세 프린체 셰프가 스페인에서 맺은 인연이 계기가 됐어요. 프린체는 협동조합 고치가 부산 초읍에서 운영하는 스페인 레스토랑이예요. 고 셰프는 앞서 서울에서 열린 MTA 글로벌 네트워크에 참석해 MTA의 마르켈(Markel)씨, 마누엘(Manuel)씨, 욘(Jon)씨, 아니야(Ania)씨와 만났고, 부산과 스페인 청년이 교류하는 기회를 만들자고 했죠. 놀랍게도 우리의 가치관은 닮아있었어요. 마르켈씨가 고치의 가치관을 물었고, 고 셰프는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전체를 위해(All for one, One for all)’라는 취지로 답했어요. 그 자리에 있던 MTA 관계자는 우리의 가치관이 몬드라곤 설립자의 철학이 아주 비슷해서 놀랐대요. 저희도 놀랐죠. 지구 반대편의 서로 다른 국적의 사람들이 서로 닮은 철학과 경험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로부터 3주만에 MTA의 10여명의 팀원들이 부산에 온 거예요.   식사를 나누고, 식구가 되다 2박 3일간 고치와 MTA의 교류는 프린체에서 이뤄졌어요. 프린체는 원래 고 셰프가 혼자 운영하다가 고치와 함께 하게 됐죠. 고 셰프는 과거 세상을 바꿀 대안을 찾으려고 비행기표 한 장을 들고 몬드라곤으로 날아갔고, 2년간 스페인 생활을 했어요.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프린체를 열었어요. 프린체는 바스크어(스페인 북부‧프랑스 남부‧피레네 산맥 지방의 언어)로 ‘어린왕자의 집’을 의미해요. 고치도 보금자리, 집의 의미를 담고 있죠. 우리는 MTA 친구들이 고치와 프린체를 집으로 여기길 바랐어요. 그래서 밥을 준비했죠. 첫째 날은 스페인 가정식을, 둘째 날은 프린체의 요리를, 셋째 날은 한국식 ‘집 밥’을 대접했어요. 이에 대한 답례로 MTA 학생들은 우리에게 그들의 독특한 교육프로그램과 가치,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전했어요.   고치와 MTA MTA의 아니야씨는 “고치가 활동해온 방식과 MTA‧몬드라곤 협동조합의 일하는 방식이 닮았다”고 했어요. 세계 각지에서 온 전혀 다른 문화와 습관을 가진 청년들이 한 공간에서 공동생활을 한다는 거죠. 관계 속에서 부딪히고 갈등이 생기는 건 필연적이죠. 실수, 실패, 좌절도 겪어요. 아니야씨의 말이 기억에 남네요. 그는 “함께 지내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이 가장 많이 변한다”며 “스스로를 변화시켜 갈등을 극복하고 실패를 넘어서는 경험, 타인을 변화시키는 경험 등을 통해 팀이 비로소 하나가 되는 것이 사업의 커다란 동력이다”고 조언했죠.고치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활동한다기보다, 평생을 함께 살아가보려 해요.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요하기에 활동과 일을 하는 것일 뿐, 활동과 일에 매몰되기보다 함께 해나가는 과정에서 구성원들이 보람과 동기를 느끼며 전체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죠.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전체를 위해(All for one, One for all)’는 그런 의미예요. 아니야씨도 이 같은 고치의 성격이 MTA와 닮아있다고 강조했죠.                       협동조합 고치와 스페인 MTA 학생들의 모습. 고치에서 나비로 마누엘씨와 나눈 대화를 소개할게요. “3학년이 되면 인도 콜카타에 위치한 ‘마더 테레사 하우스’에서 봉사를 하게 된다. 극빈층을 위해 세워진 병원이다. 사전조사를 통해 우리는 특권층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가 몬드라곤에서 태어났기에 보지 않아도 되는 것들, 노력하지 않아도 운이 좋아서 받았던 것들을 떠올리며 마음속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그저 회사를 만들어 돈을 벌기만 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전보다 조금이라도 더 좋게 바꾸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이번 만남의 의미는 마누엘씨의 말 속에 잘 담겨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누린 혜택을 되짚어볼 기회라는 의미 말이예요. MTA가 몬드라곤이라는 기반과 철학이 있다면, 우리는 배움과 실천의 공동체 고치라는 오랜 기반이 있어요. 지칠 때 쉴 틈을 주고, 방향을 잃으려 할 때 존재만으로 정신줄을 ‘단디(단단히의 방언)’ 붙잡아 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요즘 나는 ‘동료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해요. 부산은 청년들이 오래 정주하며 자신의 터를 마련할 정서적‧재정적 기반이 없기 때문이죠. 동료가 되려면 그들과 마주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오랜 시간 나를 지켜봐준 성숙한 어른이 있고, 동료를 만들어본   경험이 있다는 거예요. 자신과 타인의 연결성을 깨닫고 스스로 우뚝 서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교류할 수 있는 플랫폼은 존재만으로도 가치 있어요. 한 사람이 전체 속에 역할을 찾고, 스스로 존재를 깨닫게 하는 중요한 장치가 되죠.MTA를 만나며 훗날 아카데미로 성장한 고치의 모습을 상상했어요. 내가 30, 40대가 됐을 때 몬드라곤 지방의 청년들처럼 고치의 긍지와 자부심을 물려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실현될 거라는 강한 소망과 갈증을 느낀다면 ‘All for one, One for all’이라는 고치의 슬로건처럼 함께 믿어줄 또 다른 누군가가 나타날 것이라 생각해요. 앞으로도 수많은 동료들과의 만남을 기대합니다.  
    • 살롱
    2020-04-28
  •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김경림 화화(話花) 대표
    정치섭 기자 btip@mbusan.co.kr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가운데 하나인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탄생시킨 ‘존 로널드 루엘 톨킨’은 그간 흩어져 있던 서양 신화와 독창적인 이야기를 한데 묶어내는데 성공했다. 게르만 신화였던 엘프(Elf)와 드워프(Dwarf)는 그의 손의 거쳐 생명력을 얻었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포함한 후대의 많은 작품들이 톨킨의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톨킨의 세계관을 연구하는 골수팬들이 있을 정도로 그의 스토리텔링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서양 판타지는 톨킨의 전후(前後)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에도 신화가 있습니다. 우리만의 수많은 신화와 구전문학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묶어 전하면 우리도 톨킨처럼 전세계 독자들을 충분히 매료시킬 수 있을 겁니다.” 김경림 화화(話花) 대표의 말이다. 그는 자신감이 넘쳤다. 자신감은 이유가 있었다. 오랜 기간 남녀노소(男女老少)할 것 없이 사랑받아온 우리네 이야기가 첫 번째고, 자신의 손을 거친 개성 있는 캐릭터 디자인이 두 번째다. 묘시월드(猫時-World)는 그렇게 탄생했다. 김 대표의 손을 거쳐 탄생한 묘시월드는 흥미로운 설정의 작품이다. 동양 십이지신(十二支神)의 달리기 설화를 차용했다. 십이지신의 순서를 정하기 위해 달리기 경주가 벌어졌는데, 고양이는 쥐의 말에 속아 십이지신이 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십이지신은 낮과 밤의 일상을 다스리지만 열세 번째 신인 고양이신(猫神)은 이른바 열세 번째 시간인 묘시를 관장한다. 서양에서 숫자 ‘십삼(13)’은 불길한 수(數)로 여겨진다. 묘신은 자연 상태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귀신, 신수 등을 관장한다는 설정도 만들어냈다. 김 대표는 “동서양에서 공통적으로 고양이는 신묘한 동물로 여겨진다”며 “귀신을 본다든지 마녀와 함께 다닌다든지 하는 이미지를 모두 차용하기에 좋은 동물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부산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지난 2004년 캐나다 유학길에 올라 현지에서 가장 큰 미디어 회사인 로저스 미디어(Rogers Media)에 취업, 아트디렉터로 최고의 직위에 올랐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뒤로 하고 그가 돌연 귀국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김 대표는 “누군가의 아트디렉터보다 스스로 기획하고 디자인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유학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 같다. “본격적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인 2000년, 부산대학교 시각디자인 전공 2학년 때 8개월간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캐나다 알버타(Alberta)주 에드먼튼(Edmonton)이었다. 그곳은 1940년대 석유가 발견, 천연가스를 다른 지역으로 공급하는 곳이라 세금이 상대적으로 적고 그 영향으로 물가도 저렴했다. 원래 영어공부를 좋아했지만 현지 영어는 달랐다. 시간, 비용을 헛되이 쓰지 않으려고 열심히 공부했다. 캐나다 생활은 인상 깊었다. 여성에 대한 시선에서 더욱 그랬다. 청년들은 공감하겠지만 한국은 사회‧문화적으로 여성에 대한 역할과 기대가 정해져있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더 심해서 20대 중후반이면 시집을 가야한다는 생각도 팽배했다. 캐나다는 여성도, 워킹맘도 노력하면 충분히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선진적인 미술, 디자인도 배워보고 싶었다. 미술과 디자인 분야는 유럽과 북미에서 발전됐기 때문이다.”     -유학생활은 어땠나. “부모님의 설득으로 부산대를 졸업하고 유학길에 올랐다. 부모님은 유학이 실패할 경우 고졸자로 남게 될 딸을 걱정했던 것 같다. 졸업 후 2004년 캐나다로 떠났다. 캐나다에서는 디자인 분야 석‧박사 과정이 없어서 대학부터 다시 다녀야 했다. 목표는 분명했다. 디자인 분야에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북미에서 최고의 지위인 아트디렉터에 오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걸림돌은 역시 언어였다. 어학연수 때와는 또 달랐다. 외출할 때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생활부터 대학수업까지 모두 영어를 썼고, 그게 현지에서는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생활자체가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그러던 2006년 여름, 커다란 슬럼프가 찾아왔다. 귀국하고 싶다는 생각이 엄청났다. 하지만 부모님께 죄송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유학까지 왔는데 이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해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해보자고 결심했다. 대학 친구들은 모두 집으로 갔지만, 여름방학 기간에 학교에 남아 서머스쿨(summer school)에 다녔다. 온종일 공부에 매달렸다. 정말 신기하게도 어느 날 갑자기 입과 귀가 뻥 뚫렸다. 영어로 혼자 중얼대는 소리, 하고 싶은 말을 생각과 동시에 영어로 내뱉을 수 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온 동창들이 ‘방학 때 무슨 일 있었냐’고 할 정도였다. 자신감을 얻었다. 디자인 공부도 속도가 났다. 덕분에 2006년 3학년 1학기에 ‘로저스 미디어(Rogers Media)’에 인턴직에 교수 추천을 받을 수 있었다. 30명이 지원해 한 명만 교수 추천을 받는 자리였다.”   -아트디렉터가 된 것인가. “인턴은 시작에 불과하다. 인턴은 고용이 불안정하다. 그런데 무급 인턴기간이 한 달 반쯤 지났을 때 매니저가 포지션을 제안했다. 하루 4시간의 파트타임을 거쳐 몇 개월 후 마침내 풀타임 정직원을 제안 받았다. 입사 3년 뒤에 작은 부서의 아트디렉터가 됐고, 다시 1년 뒤 규모가 큰 헬스(의약‧약학 잡지 및 신문)부서의 아트디렉터가 됐다. 꿈꾸던 아트디렉터가 됐지만 다음 사다리(커리어)가 고민이었다. 부서이동일 뿐 역할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아트디렉터로서 해당부서의 일만 해야 할 것 같았다. 목표를 이뤘는데 아쉬웠다.”     -화화를 설립한 계기인지. “고민하던 어느 날 친구를 만났다. 그는 교포 2세로 한국말을 전혀 못했다. 자녀에게 한국의 동화, 한국의 문화를 알려주고 싶은데 영문으로 된 적절한 책이 없다고 토로했다. 외국에 있으면 자신의 뿌리에 대한 향수가 생긴다. 그도 한국적인 정서를 그리워했다. 그 순간 ‘한국적인 설화, 동화 등의 이야기를 엮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 삼아 한국형 신데렐라 스토리에 등장하는 콩쥐팥쥐의 캐릭터를 디자인해 그 친구에게 보여줬다. 반응이 좋았다. 여기에 스토리텔링을 가미해보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캐나다에서는 자료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온라인밖에 없었다. 자료를 제대로 찾아보자며 귀국을 결심했다.”   -멀리 돌아왔다. 화화는 어떤 회사인가. “화화(話花)는 한문으로 ‘이야기꽃’이라는 뜻이다. 우리 회사는 이야기꽃을 피우고자 하는,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하는 콘텐츠 기획사다. 특히 콘텐츠는 단군신화와 같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한다. 책으로 인쇄해서 배포하는 것보다는 콘텐츠를 개발하고 세계관을 구축하는 기획이 핵심인 회사다. 이를 현대화하고 글로벌(global)화 하고 싶다.”     -대표적으로 묘시월드가 있는데. “묘시월드는 십이지신의 달리기 설화를 바탕으로 한다. 십이지신이 될 수 있었던 고양이가 쥐의 꾐에 넘어가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래서 지금도 고양이는 쥐를 쫓는다는 구전이 있다. 우리는 고양이를 열세 번째 신으로 설정했다. 하루의 낮과 밤의 시간을 관장하는 십이지신과 달리 묘신(고양이신)은 열세 번째 시간인 묘시와 함께 귀신과 신수 등을 관장한다. 묘시는 시공간이 합쳐진 것이다. 있다고도 없다고도 볼 수 없다. 귀신과 신수도 마찬가지다. 묘시월드의 책에는 묘신을 비롯해 우리나라에 구전되는 신령(산신령 등), 신수(해태, 용 등), 귀신(처녀귀신, 물귀신 등), 요괴(동자삼 등) 등으로 규정했다. 여기에 아기자기한 캐릭터 디자인을 개발해 적용해 눈길을 끌게 했다. 묘시월드는 어린이부터 30대까지 폭넓게 즐길 수 있는 콘텐츠다.”   -단기간 성과가 눈에 띄는데. “2018년 부산시창업지원센터가 주관한 사업에 응모, 우리가 창조한 세계관에 있는 용왕 등의 캐릭터를 활용해 만든 보드게임 ‘백도(Back Do)’가 최근 출시됐다. 윷판과 윷가락(종지윷)에도 디자인을 가미했다. 단순히 윷을 던져 말을 옮기는 것에서 나아가 보드게임의 특징을 차용했다. 특정 장소에 말이 도착하면 복불복 카드를 뽑게 된다. 이 카드에 우리의 캐릭터를 심어 놨다. 예컨대 심청이 카드를 뽑으면 ‘용궁으로 간 심청이가 3년 후에 인간세계로 돌아온다’는 설명과 함께 세 번의 턴을 쉬어야 한다. 아울러 지난해 초기창업패키지에 선정, 우리가 만든 캐릭터를 활용한 파일럿 애니메이션 세 편이 올해 완성됐다. 애니메이션에 대해 관심 있는 플랫폼에서 연락이 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향후에도 세계관을 계속 확장할 계획이다. 우리의 설화와 구전에 등장하는 다양하고 수많은 캐릭터를 스토리에 녹여 하나의 세계관에 표현하는 것이 목표다.”
    • 살롱
    2020-01-29
  • [법조IN] 조묘진 변호사
    김태준 기자 ktms16@mbusan.co.kr   조묘진 변호사는 해기사 출신의 법조인이다. 4년가량 승선원으로 바닷길에 올라 오대양(五大洋)을 누볐다. 험하다는 바다생활에서 조 변호사가 얻은 것은 끈기였다. 그는 포기하는 순간 모든 게 끝이라고 믿었다. 조 변호사는 “현시점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며 “한번 몰두하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공교롭게도 해기사와 변호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에는 매번 친구가 있었다. 해기사라는 복장을 입게 한 한국해양대 승선학과에 진학할 때는 친구를 따라 대입원서를 접수했고, 로스쿨 진학으로 이어진 이 학교 조교 지원 때도 친구가 있었다. 조 변호사는 “우스갯소리지만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그대로였다”며 “우연한 기회가 현재를 만들었다”고 털어놨다. 조 변호사의 바다경험은 단순히 해상사고에 대한 이해도만 높이진 않았다. 한 때는 내성적인 시절도 있었지만, 20대 젊은 여성으로 거친 바다를 이겨낸 경험이 있다. 시련에 쉽사리 좌절하지 않는 성격은 그때부터 서서히 형성됐을 것이다. 인터뷰 도중에 자신의 소신을 말할 때마다 조 변호사의 눈빛이 유난히 반짝였다. 조 변호사는 특별한 이력만큼이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다행히 부산지법의 동계 휴정기간을 맞아 짬을 낸 조 변호사를 만나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해기사 출신이라는데. “한국해양대학교 해사대학 운항시스템공학부를 졸업했다. 자동차의 경우 운전자와 수리공이 있듯 선박도 크게 항해(갑판부)와 기관(기관부) 담당으로 역할이 구분된다. 쉽게 말해 배를 모는 역할과 고치는 역할이다. 그런데 운항학과는 두 개의 분야를 모두 아우르는 학과다. 미래 해상산업의 수요를 고려한 대학과정이었다. 향후 선박이 자동화되면 최소 선원만 승선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항해와 기관을 모두 알아야한다는 생각으로 만들어졌다. 다만 선박의 완전 자동화가 생각보다 더디고, 실현가능성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있었다. 또 1998년 기준으로 일반 대학은 학점이수가 120학점인데 반해 승선학과는 160학점을 이수해야 해 지금은 학과가 없어졌다. 학과가 사라진 것은 안타깝지만 항해와 기관을 모두 아는 해기사 출신의 변호사라는 희소성이 크다.”   -학교 생활은 어땠는지. “문자 그대로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식이었다. 친구가 한국해양대 승선학과에 지원한다고 해서 함께 원서를 썼는데 그 친구는 떨어졌고 혼자 합격했다. 하지만 학교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망망대해 해상에서의 생활 및 각종 위험이 있는 선박에서의 생활에 적응하도록 하는 훈련, 선박 실습 등은 강한 정신력과 체력을 필요로 했다. 내성적인 편이었는데, 군대와 같은 문화도 초기에는 적응이 어려웠다. 자퇴서 제출을 고민할 정도였던 고비를 두 차례나 넘기며 무사히 학교를 졸업했다. 학교를 졸업하며 20대 초반인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승선했다. 이 기간 내내 배를 타고 유럽, 호주, 미국, 동남아 인근 바다를 누볐다.”     -배를 타며 느낀 점은. “선상 생활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여성에 대한 배려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들만 있는 세계에서 적응하기란 훨씬 힘들었다. 간단하게는 남들이 잘 때 빨래를 해야 하는 불편부터 승선원으로서 한몫을 해야 한다는 부담도 컸다. 승선원 수는 정해져있다. 돌발변수에 시간을 끌 여유가 없는 경우도 많다. 스스로 위기상황에 예방하고 대처하기 위해 늘 긴장해야 했다. 2003년 배를 타고 호주로 향할 때의 일이다. 국내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태풍 ‘매미’의 북상 소식을 미리 파악해 아주 먼 우회로를 따라 운항했다. 아찔한 경험도 있었다.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에 레이더에도 잡히지 않는 목선(木船)과 충돌할 뻔한 일도 있었다. 특히나 서해를 따라 중국으로 북상할 땐 소규모 어선이 많아 주의해야 한다. 열대저기압인 태풍을 연이어 세 차례나 만나며 4시간 동안 배가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뒤로 몇 마일을 밀려난 경험도 했다.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친한 해기사가 탄 배는 인도네시아 해상에서 해적을 만나기도 했단다. 다행히 그 배의 삼등 항해사가 인도네시아 사람이었고, 인도네시아어로 해적을 설득해 돌려보냈다고 하더라. 힘들어도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기사를 그만두더라도 할 일, 즉 미래에 대한 비전(vision)이 필요했다.”   -변호사를 선택한 이유인가. “직접적인 계기는 아니지만, 이번에도 친구가 역할을 했다. 2007년 친구를 따라 한국해양대 조교에 지원했다. 친구는 불합격, 나는 합격이었다. 조교를 하던 중 평소 알고 지내던 선장을 오랜만에 만나게 됐다. 그는 곧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이 생기니 지원해보라고 조언했다. 그 때만 해도 로스쿨 제도가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이번엔 교수가 로스쿨을 언급했다. 이야기를 두 차례 들으니 로스쿨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더라. 특히 해상분야를 잘 아는 해기사 출신 법조인이 많지 않아 할 일이 많다고도 했다. 로스쿨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하게나마 미래에 대한 비전을 찾은 것 같았다. 그렇게 부산대 로스쿨에 진학했다.”   -악착같이 공부했다던데. “공부하며 손목을 접질릴 정도로 볼펜을 오래 잡았고, 학교에 정전이 발생했을 땐 노트북 모니터 밝기를 불빛 삼아 공부했다. 로스쿨 초년생 땐 변호사에 대한 좋지 못한 선입견도 있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변호해 혐의를 벗겨준다는 관념이었다. 미디어에 비쳐진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생각이 점차 바뀌었다. 변호사는 억울한 사람을 변론하고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직업군이었다. 공부를 할수록 변호사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은 사라졌지만, 악착같이 공부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면한 일과 같았다. 그 자리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라 매달린 것이다. 변호사가 되고 안 되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해상분야 수요는. “해상사고는 한번 발생하면 금전적 피해가 크다. 선박이 사고예방에 노력하고 있어 수요가 점차 줄어든다고 한다. 또 해상사고 대부분을 서울의 대형로펌에서 수임하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선박충돌과 화물사고 등 보험사가 개입하는 전통적 형태의 해상사고만 고집하지 않고, 선박 및 해상과 관련한 다양한 부분까지 포괄하면 수요는 여전하다.”   -해사법원 설치, 진행은. “부산변호사회 해사법원설치추진특별위원회 위원으로 열심히 활동 중이다. 해사법원 설치는 다양한 지역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일이다. 부산을 포함한 인천에서도 설치를 주장한다. 서울도 유치를 위한 목소리를 낸다. 각 지역이 서로 설립의 당위성을 밝히는 상황이다. 부산은 해양금융도시라는 특징이 있다. 또 부산지검은 대규모 해양사고나 해양범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해양범죄중점검찰청에 2017년 지정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해양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해사법원의 부산 설립을 공약으로 내걸기도 했다. 해양 및 선박금융과 관련한 다수의 기관들이 현재 부산에 있고, 선박과 관련한 실질적인 운영이 부산에 있는 해운회사에서 이루어진다. 단순히 전통적인 해상 사건, 즉 해상보험 사건만 볼 일은 아니다. 또 법률상 정해진 관할에 따라 해사법원의 위치를 주장하기보다는, 해상과 관련한 다양한 사건을 다뤄 경제적인 효과를 비롯해 전 세계에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서는 해상 관련 기관들이 모여 있어 유기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부산이 가장 적합한 것으로 생각된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변호사 수는 갈수록 늘고 있다. 지난해에만 100명가량의 신입 변호사가 부산변호사회에 등록했다. 이는 밥그릇 싸움이 아니다. 시장이 지나치게 포화되면 기존 변호사뿐만 아니라 신입도 힘들게 된다. 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두가 어려운 상황이지만, 늘 그랬듯 현시점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초심을 잃지 않고, 돈에 따라가지 않으며, 사람을 중심에 놓고 활동할 것이다. 소박하지만 정직하게 사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
    • 살롱
    2020-01-28
  •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
      이재남 기자 luxstar00@naver.com     내년 제25주년을 맞은 부산국제영화제는 어떤 모습일까.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BIFF) 이사장은 “국내와 아시아 영화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잔치이자, 다양성과 포용성을 한층 강화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며 “초국적 매개체로서 BIFF가 지역적 자산을 전 세계에 소개하는 기능도 강화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올해 BIFF의 슬로건은 재도약이었다. 그간 외적인 부침을 겪은 것도 사실이다. 과거 침체와 정상화를 거친 BIFF는 올해를 재도약의 원년으로 삼았다. 눈에 띄는 성과도 거뒀다. 영화제의 고향인 중구 남포동 BIFF광장에서 진행된 ‘커뮤니티BIFF’가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끌며 원도심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프리페스티벌 형식으로 운영, 잠재성을 확인했고 올해에는 작품 수를 대폭 늘렸다. 덕분에 참여자는 1만9470명으로 전년도(6634명)보다 3배가량 증가했고 연령대도 다양해졌다. 이 이사장은 “원도심 활성화, 관객주도형의 측면에서 커뮤니티BIFF의 발전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며 “문화예술이 도시재생에 기여하는 선례”라고 강조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OTT(Over The Top)’라는 시대적 흐름도 체감했다. OTT는 전파나 케이블이 아닌 인터넷을 통해 미디어 콘텐츠를 접하는 방식이다. 넷플릭스와 유튜브 등이 대표적이다. 이를 감안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지난해 ‘더 킹:헨리 5세’ 등 네 편의 넷플릭스 영화를 상영했다. 이처럼 부산국제영화제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이사장은 “영화산업의 변화를 이해하면서 부산국제영화제의 역할을 고민할 시기”라고 말했다. 올해 다양성과 포용성을 더욱 강화하겠다고 예고한 이 이사장을 만나봤다.   -2019 부산국제영화제 총평은. “올해는 BIFF의 재도약, 한국영화 100주년으로서 의미 있는 영화축제였다. 슬로건은 재도약이었다. 영화제는 과거 정치적인 이유로 상처를 많이 입었고 조직운영 등이 무너져 있었다. 조직을 개편하고 새로운 사업을 모색했다. 디지털 문화가 예상보다 빠르게 변하며 영화제는 새 과제에 직면했다. 내년 25주년에 대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울러 올해는 한국영화 100주년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한국영화가 100년간 어떻게 변했고, 부산국제영화제가 어떤 기여를 했는지 생각했다. 영화제가 앞으로 한국영화에 어떤 기여를 할지도 고민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쌍두마차였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에는 지금도 회자되는 좋은 영화가 많이 탄생했다. 당시 영화는 전 국민의 유일한 오락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태동한 1990년대부터 한국영화는 또 다른 황금기를 맞았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성장과 함께 한국영화도 성장하며 아시아 영화산업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갖게 됐다. 지금은 국내에서 한 해 400편의 영화가 만들어진다. 내년 25년을 맞은 부산국제영화제는 앞으로 25년을 어떻게 준비할지 고민하고 있다.”     -다양성을 강조했는데. “부산국제영화제의 출발점이 다양성이다. 그리고 아시아 문화의 연대다. 한국영화가 전 세계로 나아가는 플랫폼 기능을 했다. 이제 영화제는 국내영화뿐 아니라 아시아 영화를 세계에 소개할 정도로 성장했다. 이들이 세계에서 제대로 평가받도록 연대해 돕는다. 국내 변화부터 생각해보자.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가 시작할 때만 해도 일반관객이 외국영화를 접하기 어려웠다. 문화적 다양성에 갈증을 느끼던 시기였다. 경제성장 속도에 비해 문화예술 분야의 성장은 더뎠다. 당시 부산국제영화제의 역할은 확실했다. 서구와 아시아 영화를 엄선해서 국민들에게 보여줬다. 하지만 최근엔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새로운 시대적 흐름이라면 OTT문화가 일상에 스며든 것이다. 영화제가 아니라도 다양한 영상, 미디어 콘텐츠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 이제 부산국제영화제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남는다. 우리는 다양성에 보다 더 집중하려 한다.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극동아시아 등을 막론하고 우리 영화를 팔기만 하고 그들의 것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한류(韓流)가 오래갈 수 없을 것이다. 다양성은 부산국제영화제의 출발점이자 강화하려는 부분이다. 다양성과 포용성이 부산국제영화제의 역할이다.”   -커뮤니티BIFF도 관심을 끌었는데. “기획 의도는 부산국제영화제의 다양성과 포용성이었다. 프로그래머가 엄선한 작품 300편가량을 소개하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시도였다. 일반 관객들이 ‘나는 이런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하면 우리가 돕겠다는 것이다. 선착순으로 영화 필름을 구입하는 것에서부터 공간을 마련하는 것까지 지원했다. 일반 관객이 문화기획자가 되는 일이다. 관객이 주도하고 시민이 참여하는 형태다. 이런 분야는 기성세대보다 청년이 더 빠르다. 청년들은 이미 스스로 기획하고 즐기는 문화에 익숙하다. 의사들의 모임이라면 예컨대 뇌 과학과 관련한 영화를 보고 관람 후 세미나를 열어 인문학적 토론을 할 수도 있다. 술에 관한 영화, 미술에 관한 영화 등 다양한 주제로 커뮤니티가 형성될 수 있다. 커뮤니티BIFF는 말 그대로 커뮤니티이자 하나의 종합예술이 될 수 있다. 앞으로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신청할 것이다. 도시재생이라는 측면에서 문화예술이 생명을 불어넣는 효과도 기대된다. 앞으로 발전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관객 수가 다소 감소한 것은 어떻게 보나. “영화제별로 관객이 1만~2만명 늘거나 줄 수는 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올해에는 OTT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을 던졌다고 본다. OTT시대에 영화제의 변화에 대한 요구, 숙제라고도 볼 수 있다.”     -내년 부산국제영화제는 어떻게. “영화제가 25주년을 맞았다. 국내에서 25주년을 맞은 영화축제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유일하다. 상징성이 크다. 영화인들에게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고 있다. 국내 영화인과 아시아 영화인을 위한 잔치가 될 것이다. 우리가 발굴해 세계적인 감독으로 발돋움한 영화인들을 한자리에 초청할지를 고민 중이다. 내년에는  주요 영화제 집행위원장과 영화산업 주요 관계자를 모아 앞으로 온라인 시대를 어떻게 맞이할지 머리를 맞대는 자리다. 25년이라는 시간의 고민을 정제해서 드러내는 시기가 될 것이다.”   -향후 영화제가 나아갈 방향은. “세계적인 영화제가 됐지만 한국의 특수한 정치지역성 탓에 지역 영화제로 폄하되는 일이 있다. 한국이 정말 좋은 나라가 되려면 지역적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BIFF는 초국적 매개체로서 부산과 국내, 아시아가 가진 지역적 자산을 전 세계에 소개하는 기능을 강화할 것이다. 초국적 매개자 역할을 강화하려면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의 영화를 포함해야 한다. 아시아 영화 소개의 산파(産婆)역할을 해야 한다. 부산은 자신감을 가질만한 도시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서울과 일본 도쿄 등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에게 인색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항구도시, 문화도시로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시민들이 도시개념이 사라진 ‘코즈모폴리턴(cosmopolitan, 세계인)’이 된다는 의미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문화에 당당한 축으로 도움을 주고 싶다.”
    • 살롱
    2019-12-18
  • [법조IN] 고지현 변호사
    정치섭 기자 btip@mbusan.co.kr   “변호사님, 유명해지고 싶습니까?” 영화 ‘암수살인’의 모티브가 된 사건의 범인 A씨가 지난 2016년 고지현 변호사를 만나 던진 말이다. 고 변호사는 항소심에서 A씨의 국선변호를 맡아 접견을 위해 부산교도소를 찾았다. A씨의 질문에 고 변호사는 “아뇨”라고 짧게 답했다. 영화는 부산에서 발생한 암수(暗數)범죄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2017년 개봉했다. 암수범죄란 수사기관이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용의자 신원파악 등이 어려워 범죄통계에 집계되지 않은 사건이다. A씨는 앞서 2010년 9월 유흥주점 여성종업원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 받아 복역 중이었다. 이후 “10명을 더 살해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경찰에게 보내며 살인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가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했다. 2016년 1월 1심은 그의 진술 중 동거녀 살인 혐의만 인정, 무기징역을 선고하며 “자백과 번복으로 수사기관을 농락했다”고 밝혔다. A씨의 사례를 눈여겨볼만한 사건이 최근 다시 벌어졌다.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 이춘재가 앞서 경찰이 모방범죄로 결론지은 8차 사건에 대해 자신이 진범이라고 자백한 것이다. 이에 대해 고 변호사는 “이씨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면서도 “과거 A씨의 경우 자신의 사건을 내가 맡으면 유명해질 것이라고 말하는 등 주변에 더 큰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범인의 심리가 있다는 의미다. 고 변호사는 부산대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2009년 제 50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40기)을 수료, 9년차 변호사로 활동 중인 그는 화려한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이 중 하나가 2013년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해 위헌 결정을 이끌어낸 일이다. 헌법소원은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는지를 판단해달라고 헌법재판소에 요청하는 것이다. 고 변호사는 구(舊)고용보험법 제35조 제1항을 두고 헌법소원을 청구, 재판관 전원 일치로 위헌 결정을 이끌어냈다. 지금까지의 변호사 활동에 대해 고 변호사는 “법조계 선배들이 10년 정도 이 분야에서 일하면 그제야 변호사 일을 깨닫게 된다고 하더라”고 전하며 “후회하지 않는 삶을 위해 멋지게 활동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영화 암수살인 실제 피고인 변론을 맡았는데. “2016년 부산고법에서 국선변호인으로 지정돼 피고인 A씨의 변론을 맡았다. 항소심을 앞두고 구치소에서 접견했다. A씨는 이미 두 차례 접견을 거부했다. 세 번째도 거부하면 사임계(사임의사를 밝힌 문서)를 제출하려고 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A씨가 만나겠다고 했다. 첫 만남에 A씨는 ‘사건을 얼마나 알고 있나’고 물었다. TV프로그램에도 나왔으니 안 봤으면 보라고도 하더라. 그러면서 ‘자기 사건을 맡으면 유명해질 수 있다’는 말도 했다. 자신을 과시하려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명해지고 싶냐는 그의 물음에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A씨는 사건을 회상하며 격앙되거나 불안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했다. 그런데 앞서 경찰에서 자신이 진술한 내용을 법정에서는 일관되게 부인했다. 피해자 유가족을 생각하면 자세한 설명은 삼가야 할 것 같다. 항소심 결과는 쌍방 항소 기각이었다.”    -자백의 증거능력은. “경찰수사 단계에서 피의자 자백은 언제든지 뒤집어질 수 있다. 법정에서 부인하면 증거로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경찰에서는 ‘피의자 신문조서’라는 것을 작성한다. 이를 법정에서 번복하는 것을 ‘내용부인’이라고 한다. 이게 가능하다. 고문, 회유, 협박 등을 통한 허위자백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제도다. 과거 피고인의 정신지체 여부나 정도 등을 판단할 수 없던 시기가 있었다. 1960, 1970년대 무렵인 것 같다. 혹시나 경찰의 협박, 회유 등으로 피의자가 자백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법정에서 피고인이 자신의 진술을 번복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경찰은 자백이 있더라도 이를 바탕으로 물적 증거를 보강하는 수사방법을 사용한다. 반면 검찰단계에서의 자백은 증거원칙상 내용부인이 불가능하다. 검찰에서도 신문조서를 작성하는 데 이를 번복하려면 고문 등에 의한 자백이라는 것을 피고인이 직접 증명해야 한다.”   -헌법소원에서 위헌을 이끌어냈는데. “2007년 9월 부산의 한 병원에서 직업능력개발훈련을 실시했다. 한 달간 직원 65명을 대상으로 연수를 실시해 이듬해 1월 부산고용노동청에서 492만원가량의 지원금을 받았다. 그런데 한 명이 이틀간 수업에 빠지며 대리출석을 시킨 사실이 4년이 지난 2011년 적발됐다. 부산고용노동청은 2008년 1월부터 약 1년간 실시된 모든 교육에 지급한 2억여원을 환수하려 했다. 구(舊)고용노동법 제35조 제1항에 따른 것이었다. 이 조항은 ‘노동부장관은 거짓이나 그 밖의 부정한 방법으로 고용안정‧직업능력개발 사업 지원을 받은 자 또는 받으려는 자에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지원을 제한하거나 이미 지원된 것을 반환하도록 명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이 조항은 소급적용을 하지 않는다는 행정처분의 원칙을 벗어났다. 또 1명의 부정행위로 인해 전체 직원에게 제공된 교육비를 모두 회수하는 것도 잘못됐다고 생각해 2011년 12월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당시 유사한 건으로 전국에서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전체 소송가액이 수백억원 규모는 될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의 몇몇 로펌에 연락해 헌법소원심판을 함께 해보자고 했더니 거절하더라. 위헌을 이끌어낼 가능성이 없다고 본 것 같았다. 하지만 법리적으로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단독으로 진행해 2013년 결국 위헌 결정을 받아냈다.”     -이 밖에 기억에 남는 사건은. “가정폭력 피해자의 주민등록을 남편이 말소(거주불명 등록)시킨 사건이다. 피해자 B씨는 2015년 5월 남편에게 폭행당하고 집에서 쫓겨나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시설(쉼터)에 입소했다. 피해자 남편은 B씨가 ‘집에서 살지 않는다’며 주민등록 말소 신청을 했다. 주민등록법상 거주지에서 30일 이상 살지 않으면 말소 요건이 된다. 주민센터는 B씨에게 전입신고를 하라고 연락했다. B씨가 보호시설에 있어 옮겨갈 주소가 없으니 주민등록 말소를 막아달라고 했다. 하지만 주민센터는 법대로 할 수밖에 없다며 B씨를 거주불명자로 등록했다. 결국 국가권익위에 사건을 보냈다. 국가권익위는 B씨의 거주불명등록 처분을 취소하고 관련규정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이후 2016년 12월 법령도 개정됐다. 현행 주민등록법 시행령 제30조 제2항은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조 등에 따라 설치된 보호시설에 입소한 가정폭력 피해자에 대해서는 직권으로 등록사항의 말소 및 거주불명 등을 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변호활동의 원동력과 향후 계획은. “일할 때는 일만, 쉴 때는 푹 쉬자는 생각이다. 공적인 시간과 사적인 시간을 확실히 구분한다. 쉴 때는 여행을 가고 운동도 한다. 최근 6개월간은 그림 그리기를 배우고 있다. 선생님이 들으면 웃을 정도의 실력이지만 지금은 유화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얼마 전까지는 텃밭 가꾸기에 빠져있었다. 쉴 때는 평소 하지 못하는 것을 다양하게 해보려 한다. 일에만 매몰되면 시야가 좁아진다. 변호사에게는 폭넓은 지식이 중요하다. 다양한 의뢰인을 만나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특성화 분야를 키워서 역량을 강화하라는 이야기도 있다. 공감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하나만 알아야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서로 연결된 다양한 법과 사회를 이해하고 그 가운데 특정분야를 심화시켜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변호사 선배들이 했던 말이 있다. 변호사 생활을 10년쯤 해야 변호사가 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올해로 9년차고 내년이면 10년차 변호사가 된다. 이제 겨우 변호사가 뭔지, 어떻게 활동해야 하는지 알게 된 것 같다. 앞으로도 성실한 변호사로 살고 싶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며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
    • 살롱
    2019-11-05
  •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주강현 국립해양박물관장
    양정원 기자 7toy@mbusan.co.kr   물방울이 모여 하천이 되고, 산과 들을 흘러 바다로 향한다. 바다는 작은 물방울에서 비롯된다. 부산시 영도구 동삼동 동삼혁신지구, 바다와 맞닿은 곳에 ‘거대한 물방울’이 있다. 바다의 물방울이 수면에 부딪혀 주변으로 튀어 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건물, 바로 국내 최초의 종합해양박물관인 ‘국립해양박물관’이다. 건물 외형은 바닷바람이 비껴갈 만큼 유선형의 독창적인 모양이다. 바닷물의 시작이 물방울이듯, 2012년 4월 개관한 국립해양박물관은 국내 해양사(史)와 해양문화의 새로운 출발점이 됐다. 지난해 7월 국립해양박물관은 혁신의 기회를 얻었다. 주강현 관장이 제2대 국립해양박물관장에 취임한 것이다. 당시 해양수산부는 주 관장에 대해 “해양사와 고고학, 민속학, 인류학 등 융복합 연구를 수행하며 국내 해양문화에 대한 연구논문 50여편과 저서 50여권을 집필하는 등 전문성을 갖췄다”고 소개했다. 주 관장은 제주대 석좌교수, 해양수산부 해양르네상스위원장‧총괄정책자문위원장, 여수세계엑스포 전략기획위원,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 해양문화재단 이사 등을 역임해 해양과 문화를 모두 아는 전문가다. 국립해양박물관을 찾는 방문객은 연간 100만명이 넘는다. 2012년 설립 후 지금까지 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만 858만6000여명에 달한다. 명실상부 국내 대표 종합해양박물관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하지만 주 관장의 포부는 더욱 크다. 주 관장은 “부산에 시립박물관이 하나 더 생긴 게 결코 아니다”며 “국립해양박물관은 국내를 넘은 해양문화의 글로벌 메카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국립해양박물관을 소개한다면. “부지면적 4만5386㎡, 연면적 2만5870㎡의 지상 4층, 지하 1층 규모다.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실 등 전시 공간, 해양도서관과 대강당 등 교육 공간, 수장고(유물보관소) 9개실 등을 포함해 편의공간과 연구‧사무공간이 복합적으로 위치해 있다. 지금껏 수집한 박물관 자료만 2만3798점에 달한다. 특히 1837년 호남좌수영의 기물재고를 기록한 ‘호좌영중기’, 반야용선(불교에서 해탈의 극락정토로 향하는 상상의 배)과 세계 각국의 풍속을 그린 ‘감로도’(20세기), 이순신 장계를 등록한 임진왜란 기록물인 ‘충민공계도’(1662년), 1550년 '유럽 포르톨라노 해도(바다의 지도)' 등이 대표적이다.”     -박물관의 현안을 전한다면. “국립해양박물관은 임대형 민간투자사업(BTL) 형태로 진행됐다. 민간이 짓고 정부가 이를 임대해 쓰는 사업방식이다. 이로 인해 예산의 절반가량이 임대료와 유지관리비 등으로 사용된다. 문제는 인천에 ‘국립인천해양박물관’ 건립이 추진 중이라는 것이다. 최근 이 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도 통과됐다. 국립해양박물관의 독점시대가 끝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설립 방식도 다르다. 인천시가 부지를 제공하고 1245억원의 예산을 전액 국비로 짓는 계획이다. 4층 규모로 연 면적도 2만2588㎡로 우리와 비슷한 수준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예산의 절반가량을 BTL비용으로 사용해야 하는 반면, 인천은 다르다. 경쟁력 확보 방안을 시급히 논의해야 한다. 부산이 선점한 분야지만 이를 유지하려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예컨대 인적자원만 해도 수도권에서 내려오던 우수인력들이 향후 부산으로 내려올지 장담할 수 없다. 치밀한 계획과 아낌없는 지원이 필요하다.”   -기획전 ‘북한의 바다’는. “분단국가에서 남북관계는 알아야 한다. 전쟁은 있을 수 없다. 이해하면 싸울 일이 없다. 북한의 바다는 가까이 있지만 ‘가보지 못한 바다’,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진 바다’가 됐다. 이곳 부산을 포함한 전국엔 과거 피난민도 있다. 그들이 기억하는 바다의 모습도 담으려고 애썼다. 기록과 유물로 남겨진 북한바다를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근대부터 오늘날까지를 담은 북한 바다 사람들의 삶과 문화, 사진으로 보는 북한 바다, 1950년 비극적인 역사 속에 갈라진 분단의 바다 등 4개의 큰 주제 속에 담았다. 자료가 많지 않다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번 기획전에는 약 500점이나 전시했다.”     -이 밖에 준비 중인 기획전이 궁금하다. “글로벌 전시로 ‘세계등대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등대에 관심이 많아 전문적인 식견을 갖고 있다고 자부한다. 프랑스 큐레이터도 와서 동참했다. 도록(圖錄, 그림과 사진 등으로 엮은 책)을 2권 준비하고 있다. 하나는 한글, 하나는 영어버전이다. 부산시민들이 생각할 때 우리가 시립박물관을 하나 더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우리의 지향점은 분명하다. 글로벌 국립해양박물관이다. 영어버전의 도록은 그 일환이다. 또 하나 옛날 바다 속 지도인 ‘고해도(故海圖)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갑자기 기획했지만, 아주 중요한 전시가 있다. 바로 ‘독도강치(물갯과 포유류) 멸종 특별전시’다. 동해안에서 주로 서식한 독도강치는 19세기 초 동해에 수만 마리가 서식했으나 1905년 일본인들의 남획으로 멸종 위기에 처했고 1970년대 독도에서 마지막으로 확인됐다. 1994년 국제자연보전연맹이 멸종을 선언했다. 전시 계기는 일본의 행태에 분노해서다. 일본국제문제연구소가 강치잡이 어민 후손의 증언을 담은 영상을 올해 안에 공개한다는 내용이 얼마 전 들려왔다. 그들은 강치잡이 역사를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삼으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립해양박물관이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넉넉지 않은 예산이지만 문자 그대로 탈탈 털어서라도 부족함 없이 준비할 것이다.”   -내년에도 큰 전시회가 마련된다는데. “하나는 ‘바다에서 본 제주’, 또 다른 하나는 ‘불교해양대전’이다. 먼저 제주의 바닷길이다. ‘왜 제주일까?’하는 궁금증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제주와 부산은 가깝다. 영도 주민의 30%이상이 제주 출신이다. 아울러 국립해양박물관은 국내를 대표하는 종합해양박물관이기에 제주도를 주제로 기획전을 열 수 있다. 국내 어디든, 그리고 전 세계의 주제를 다룰 수도 있다. 하반기에는 불교해양대전을 준비 중이다. 부산의 범어사, 인근 양산의 통도사를 포함한 고찰들이 전국에 많다. 국립해양박물관이 소장한 목어(木魚)도 있다. 해양과 불교의 관계부터 해수관음 사찰로 알려진 강원의 낙산사, 남해 보리암 등도 다룰 예정이다. 불교의 전래도 마찬가지다. 역사적인 부분도 다룰 것이다. 관련 내용은 무궁무진하다.”     -해양생물 방류도 눈길을 끈다. “지난 8월 해양수산부, 제주도 등 기관과 함께 제주에서 바다거북을 방류했다. 2년가량 치료하고 관리해 바다로 돌려보냈다. 바다거북은 따뜻한 곳에 사는데 온난화 등의 영향으로 해수온도가 상승하며 한반도 연안에도 올라오고 있다. 전남 여수 인근 정치망(자루모양 그물에 깔때기 장치를 한 어구), 남해의 미역, 김 양식장에서 종종 잡힌다. 어부들은 바다거북을 용왕님의 아들이라며 보호한다. 법적으로도 보호종이지만 어부들 스스로 거북이를 신성시하는 문화가 있다는 것이다. 국립해양박물관도 이들 해양생물과 해양생태계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해양생물과 함께 살아가는 일도 중요하다.”   -해양문화에 대한 견해는. “이제 시작이다. 해양교육‧해양문화 활성화 법이 이제 막 제출됐다. 그 정도로 법적 절차는 미비하다. 모법(母法)이나 진흥책이 필요하다. 지자체인 부산도 해양수도로서 다양한 진흥방안을 보다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다양한 방안은 기존의 하드웨어 중심에서 이제는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방송과 신문 등 미디어와 영화와 음식 등 문화까지 이미 소프트파워 세상이 도래했다. 거리의 간판보다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홍보가 되면 그걸 보고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것이 소프트파워다. 우리 국립해양박물관도 탄탄한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해양문화의 메카가 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국립해양박물관으로서 선점한 위치와 차별화된 콘텐츠로 승부하며 국내를 넘어 국제적인 수준의 글로벌 종합해양박물관이 되려 한다. 최선을 다하겠다.”
    • 살롱
    2019-10-24
  • [이사람] 정석문 대신노무법인 공인노무사
    김태준 기자 ktms16@mbusan.co.kr    회사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금지된 곳에서 담배를 피우다 폭발사고로 사망한 근로자는 산업재해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 정답은 ‘그렇다’이다. 정석문 대신노무법인 공인노무사(이하 노무사)는 “산업재해에서 근로자의 과실여부는 따지지 않는다”며 “단 업무상 인과관계는 명확히 따진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 노무사는 “근로자가 하지 말라는 행위를 한 것이 쟁점이 아니라 근로자가 그 같은 행위를 한 것이 업무상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다툰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노무사는 노동관계 법률에 특화돼 있다. 일반 변호사가 법정에서 민·형사상 행위를 다툰다면 노무사는 특수행정심판인 지방노동위원회(이하 지노위)와 중앙노동위원회(이하 중노위)에서 사용자나 근로자를 법적으로 대리한다. 뿐만 아니라 최근 노동, 인권과 관련한 사회적 인식이 성장하며 사측의 경영상 컨설팅도 담당한다. 이 영역은 근로계약부터 인사 시스템, 집단적 노사관계인 단체교섭 대리 등 광범위하다. 노사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노동법률 위반 여부를 진단하고 그에 맞는 규정을 만들 수 있도록 자문하는 것이다. 정 노무사는 “최근에는 중소·중견기업을 중심으로 사내 노무사도 늘어나는 추세”라며 “사회가 성숙하며 신입 노무사들의 활동반경이 그만큼 넓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노무사란. “노동과 관련한 법률·경영 서비스를 제공한다. 노동법률 문제가 있는 곳에 노무사가 있다고 보면 된다. 기업에게는 인사관리에서 노동법률 위반 여부에 대해 법률적으로 자문하고 집단적 노사관계 자문과 단체교섭 대리, 임금과 4대보험 관리, 인사체계 컨설팅 등을 수행한다. 또 근로자에게는 임금체불, 체당금 사건, 부당해고, 부당노동행위 등 절차를 몰라 구제를 받지 못하는 어려움을 해소해 권리를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기도 한다.”   -변호사와는 어떤 점이 다른가. “노무사는 노동관계 법률에 특화된 직업군이다. 변호사도 노무사 일을 할 수 있지만, 이 분야에서 길게는 수십년간 실무를 쌓은 노무사들과는 전문성에서 차이가 난다. 노무사는 법원에서 변론 할 수는 없다. 이 분야는 변호사의 영역이다. 다만 특수행정심판인 지노위와 중노위의 행정행위는 노무사가 대리한다. 근로자가 부당노동행위를 당했다고 가정해보자. 바로 법정으로 갈 수도 있지만 지노위나 중노위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사에서 부하직원이 상사에게 폭행이나 욕설을 당하면 근로기준법 위반이다. 형사사건으로는 폭행이나 모욕죄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 그런데 근로기준법으로는 더 엄하게 처벌 받을 수 있다. 피해자가 원하면 형사처벌도 가능하다. 노무사는 이 과정에서 쌍방을 중재하거나 의뢰인을 대리하는 역할을 한다.”     -노무사를 선택한 계기는. “부산대학교 93학번으로 원래 전공은 경영학이었다. 대학에 다닐 때만해도 노무사를 몰랐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입사했다. 어찌 보면 이를 계기로 지금껏 노무사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당시 인사팀에 배치됐다. 사무실을 둘러보다가 상급자들의 책상 한편에 노동법, 근로기준법이 놓인 것을 발견했다. 사내 자문 노무사도 있었다. 그 때 노무사라는 직업군을 알게 됐다. 이후 서울로 발령받아 4년 반 정도를 근무했다. 만족도가 떨어졌다. 부산으로 재발령을 요청했는데 보내주지 않았다. 결국 2004년 회사를 그만두고 부산에 내려왔다. 노무사라는 직업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그 길로 자격에 도전해 합격했다.”   -노동 법률 분쟁 수요는. “기업 입장에서는 적법화해야 할 것들이 많다. 과거에 비해 임금체계, 인사평가제 등 컨설팅 영역들이 다수 늘어났다. 노동법에 위반되지 않는 범위에서 사내 시스템을 갖추는데 노무사들의 자문을 구하고 있다. 노사관계에서 분쟁도 많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정당함을 주장하고 근로자 입장에서 부당함을 말할 때 다툼이 생긴다. 예컨대 임금체불, 부당해고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산업재해는 어떤가. “산업재해 사건 역시 다툼이 많다. 예를 들어 조선소에서 일을 하다가 블록이 떨어졌다면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산업재해다. 따져봐야 할 부분은 질병과 관련된 산재다. 한 직장인이 있다. 그에게 주어진 업무는 쌓이고 쌓여 어느 새 5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수행하게 됐다. 우선순위를 놓고 업무를 처리하다보니 일이 밀렸고, 고객사 불만이 접수됐다. 매일 고객 미팅이 반복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옮겼지만 뇌출혈 판정을 받았다. 만약 이 직원이 사망했다면 업무상 재해로 볼 수 있을까. 이 부분에서 노사간 이견이 생긴다. 이 질병이 업무와 인과관계가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지병이 있었는지도 중요한 부분이다. 이처럼 최근엔 단숨에 판단하기 어려운 질병 관련 산재사건이 늘고 있다. 다만 업무상 재해 요건에 근로자 과실여부는 따지지 않는다. 근로자 과실여부는 이런 것이다. 가스를 사용해 제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근로자가 있었다. 흡연을 금지하는 장소에 가서 담배를 피우다가 폭발해 사망했다. 이 근로자는 야근을 앞두고 저녁식사에 반주를 걸치고 작업장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그가 흡연금지 장소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다 폭발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그는 산재를 인정받았다. 근로자의 과실여부는 따지지 않고 야근이라는 업무상 인과관계를 따져 산업재해로 본 사례다.”     -예비 노무사에 조언한다면. “노무사라는 직업군의 전망은 밝다. 과거에는 기업들이 외부 노무사들에게 자문을 의뢰했다. 하지만 노동, 인권과 관련해 기업들이 변하며 사내 노무사 등이 늘고 있다. 최근 노무사를 회사가 직접 고용하는 비율이 증가하는 것이다. 중견기업 이상, 대기업은 대부분이 사내 노무사를 둔다. 공공기관도 마찬가지다. 굳이 사내 노무사가 아니라도 전문직종이기에 개업이 가능하다. 5년 정도면 자리를 잡을 것으로 전망한다. 얼마나 빨리 자리를 잡느냐가 관건이다.”   -노동 법률 분쟁에서 명심할 점은. “노동관계 법률은 강행적 성격이 있다. 당사자 간에 계약서 등으로 약속했더라도 법에 위반되면 무효로 본다. 예방의 관점에서 노사 모두가 법을 잘 알고 규정을 만들거나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 이해하기 쉬운 예로 최저임금의 영역이 있다. 사용자와 당사자가 시간당 1만원에 근로계약을 체결했다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법적 기준을 넘겨 근로자에게 유리하게 적용하는 경우다. 반면 노사가 시간당 임금을 6000원에 합의했다면 법 위반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최저임금을 사례로 들었지만 노동환경은 다양하다. 업무성격과 근로 환경 등 다양한 요소들을 따져봐야 한다. 노무사가 존재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 살롱
    2019-10-24
  • [법조IN] 유희은 의료전문변호사
    정치섭 기자 btip@mbusan.co.kr   “이름만으로도 믿음을 줄 수 있는 의료전문변호사가 되고 싶습니다.” 유희은 법률사무소 은송 변호사의 명함에는 두 개의 직함이 적혀있다. 하나는 변호사, 다른 하나는 의사다. 유 변호사는 2009년 의과대학을, 2013년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졸업하며 부산에서 의사면허를 가진 첫 변호사가 됐다. 유 변호사는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나마 법조인이 되는 꿈을 꿨다”며 “의대를 졸업하며 어린 시절 꿈이자 의사면허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직업인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변호사로서 일찌감치 전문분야를 가진 것은 분명 큰 강점이다. 유 변호사는 환자의 치료과정을 담은 의료 차트를 이해하고, 병(病)의 인과관계를 파악해 변론에 임한다. 유 변호사는 밀양세종병원 화재사건에서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해당 병원장의 항소심 변론을 맡았다. 밀양세종병원은 ‘급성기병원’이다. 급성기병원은 요양을 목적으로 입원한 환자를 진료하는 요양병원과 달리 환자의 질병을 적극적으로 진단하고, 치료하는 의료기관이다. 유 변호사는 “요양병원과 달리 급성기병원은 환자의 보호 목적 외에도 치료를 위해 신체보호대를 적절히 사용할 수 있다”며 “이 소송결과에 따라 급성기병원에서 필요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신체보호대 사용이 위축될 수도 있는 중요한 판결이었다”고 설명했다. 신체보호대는 입원환자가 생명유지 장치를 스스로 제거하는 등의 불상사를 막기 위해 헝겊 등으로 신체 일부나 전신을 묶어두는 장치를 말한다. 유 변호사는 환자의 차트를 꼼꼼히 살펴 신체보호대 사용의 적절성을 변론했다. 지난 8월 항소심 법원은 해당 병원장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던 원심을 뒤집고 신체보호대로 환자를 묶은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일반인들은 의료분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유 변호사는 “의료사고가 의심되는 경우 일기를 쓰듯 시간대별로 상세하게 기록하고 진료기록부를 확보해야 한다”며 “하지만 모든 사고가 의료사고로 인정되지는 않는 만큼 최대한 객관적으로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전문가와 상담하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의사‧변호사 자격을 모두 가졌는데. “고등학교 때는 문과라서 그런지 법조인에 더 관심이 있었다. 의사, 교수, 기자 등도 꿈의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의과대학으로 진학했지만, 의대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해부와 수술 경험에 대해 다소 심리적인 저항이 있었던 것 같다. 의사가 되면 명의(名醫)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많았다. 그래도 공부는 꾸준히 했던 것 같다. 유급 없이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 무렵 로스쿨이 도입됐다. 의학 전공을 연계할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 변호사와 기자 등이 전문성을 활용할 수 있는 직종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꿈이던 변호사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다.”   -학창시절 공부는 어떻게 했나. “모르면 외웠다. 한창 공부할 땐 읽었던 책 페이지 전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문제를 보면 답안이 있는 페이지의 단락을 기억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소 무식한 공부법이었다. 어려웠던 점은 의대에 다닐 때는 대부분의 책이 영어로 된 원서였는데, 로스쿨에 가니 많은 용어들을 한자로 쓰던 것이었다. 한자를 새로 공부해야 했다. 어머니는 ‘그러니까 어릴 때 천자문 공부하라고 했잖아’라며 타박했다. 기자였던 아버지와 교육열이 높았던 어머니에게 혼나가며 한자를 공부했다. 이제는 사전 없이 법전(法典)을 읽을 수준은 된다.”     -로스쿨 진학에 부담은 없었는지. “의사면허를 갖고 있기에 언제라도 병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개업이나 대학병원에 가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부모님은 걱정하셨다. 병원에서 의사로서 삶이 더 안정적이라고 느끼는 것 같았다. 법률시장의 경쟁이 치열한 상황인 탓이다. 하지만 어릴 때 꿈이었다. 의사면허를 활용해 의료전문변호사로 활동하면 경쟁력도 있다고 판단했다. 부모님께는 병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설득했다. 이제 8년차 변호사가 됐다. 도전하고 꿈을 이뤘다는 점에서 내 인생의 아주 소중한 경험이다.”   -의료전문변호사는 얼마나 되는지. “의사면허를 가진 변호사는 현재 전국엔 20여명, 부산에는 3명이다. 부산에서 첫 의료전문변호사로 열정적으로 일한 덕에 의료분쟁을 포함해 자산관리공사의 자문변호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인체에 관련한 사건을 맡고 있다. 의료분쟁의 추이에 대해서는 7년 차 변호사로서 과거와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병원 관계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최근에는 분쟁이 잦아지는 추세라고 하더라. 예전에는 법정까지 안 가던 일들도 이제는 환자들이 변호사를 고용해 대응한다는 것이다.”   -기억에 남는 사건을 전한다면. “시골 할머니 두 분 사이에 사소한 다툼이 몸싸움으로 번졌다. A 할머니가 B 할머니를 밀어서 넘어졌다. 넘어진 B 할머니가 ‘이 사건으로 척추골절을 당해 수술했다’며 A 할머니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B 할머니는 하지 마비증상과 배뇨 장애 등을 주장했다. A 할머니 집에 가압류 딱지가 붙었고 소송가액은 7억원가량이었다. 노부부가 집을 나가야 할 처지였다. 의료전문변호사를 수소문한 끝에 나를 찾아왔다. 사건을 들여다보며 B 할머니가 다친 손상 부위를 주의 깊게 살폈다. 척추의 경우엔 손상 부위에 따른 증상이 다르다. 의학적 소견으로 살핀 결과 손상 부위와 증상에 차이가 있다고 보고 법정에서 이를 집중 변론했다. A 할머니의 승소를 이끌어냈다. 며칠 뒤 A 할머니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할아버지는 ‘변호사님요, 고맙심더(고맙습니다)’라고 했다. 그 집과 재산이 가압류 금액인 7억원가량 되진 않을 것이다. 두 분에겐 7억원이라는 금액보다 평생을 살아온 집에서 쫓겨날 처지가 더 무서웠을 것이다. 집을 지켜줘서 고맙다던 할아버지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밀양세종병원 참사의 병원장 변론도 맡았는데. “병원장이 화재사고 당시 환자를 신체보호대로 묶은 혐의(업무상 과실치사상)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항소심을 앞두고 찾아왔다. 이 병원장은 전국의 의료전문변호사 여럿을 수소문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돌아온 답변은 ‘이건 패소할 것 같은데’였다며 내게 변론을 부탁했다. 병원장이 1심에서 유죄를 받은 부분은 신체보호대 사용에 대한 부분이었다. 밀양세종병원은 일반 요양병원이 아니라, ‘급성기병원’이었다. 급성기병원은 환자가 누워서 요양만하는 곳이 아니라, 급히 증상이 나빠질 수 있는 곳이다. 적절한 사용을 전제로 환자의 치료를 위해 신체보호대가 없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 소송의 의미는 단순히 병원장에 대한 유·무죄를 가리는 것을 넘어 급성기병원의 신체보호대 사용의 적절성 문제로 확대될 수 있었다. 판결에 따라 급성기병원에서 환자의 신체보호대 사용이 위축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병원장의 혐의와 관련, 신체보호대의 적절성을 변론하기 위해 환자들마다 개별적으로 차트를 검토했다. 결과적으로 올해 8월 중순 항소심에서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했다. 상고는 없었다. 병원장은 이 사건 항소심에서 유일하게 선고가 바뀌었다.”   -의료분쟁에서 주의할 점은. “심리적으로 의심스럽다고 의료분쟁으로 몰고 가선 안 된다. 환자나 그 가족은 ‘의료라는 전문분야를 몰라서 손해를 보는 것 아닐까’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멀쩡한 사람이 병원에 갔더니 사망했다는 생각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변론이 어려워진다. 물론 당사자가 되면 아주 힘들다는 것은 이해한다. 소송은 다르다. 인과관계를 명확히 따져야 한다. 인체는 불가항력적인 부분이 있다. 예컨대 말벌에 쏘여도 알레르기 쇼크로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의사의 치료행위가 해당 사건·사고의 트리거(trigger, 원인)가 됐는지 냉철하게 따져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당황스럽겠지만 상세한 기록이 필요하다. 내가 호소한 증상과 의사의 진료기록 등을 일기를 쓴다는 생각으로, 복기(復棋)한다는 생각으로 시간대별로 상세히 기록해야 한다. 또한 진료기록부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아직 법률가로서 많이 부족하다. 항상 노력하는 자세로 연구하고, 또 열심히 일해서 나를 찾아주는 이들에게 적어도 변호사를 잘못 선택했다는 후회는 생기지 않도록 하고 싶다. 20년 후에는 ‘유희은’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의료전문변호사가 되고 싶다. 이름을 곧 브랜드로 삼을 수 있도록 노력하려 한다.”  
    • 살롱
    2019-10-11
  • [법조IN] 박동주 변호사
    김태준 기자 ktms16@mbusan.co.kr “이 나라에는 모든 인간이 평등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거지도 록펠러와 동등하고, 바보도 아인슈타인과 동등한 하나의 인간적인 제도가 있죠. 바로 사법제도입니다.” 소설 ‘앵무새 죽이기(하퍼 리作)’에서 변호인의 최후변론을 옮긴 것이다. 1930년대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는 백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누명을 쓴 흑인 청년과 그의 변론을 맡은 백인 변호사가 등장한다. 제목의 '앵무새'는 '무고한 사람'(흑인)이다. 재판제도는 합법적이지만 앵무새를 죽이는 순간 정의롭지 못하다. 이 소설 속 변호사는 인종차별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청년의 변론을 포기하지 않는다. 박동주 변호사는 “앵무새를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시절 우연히 읽게 된 이 소설은 어느새 그의 소신으로 굳어졌다. 박 변호사는 “특별한 무언가를 이루기보다 절실한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는 주로 형사소송을 맡고 있다. 의뢰인 입장에서는 평생을 좌우할 중요한 사건일 터. 박 변호사는 변론을 위해 연구하고 발로 뛰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법률 연구는 기본이다. 이와 함께 박 변호사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한다. 변론을 위한 밑거름이다. 뛰어난 변론은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다. 박 변호사는 “후배들에게도 인적 네트워크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며 “학업적 부담이 심한 것은 알지만 법조인이 된 뒤에도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부산 연제구 법원로에 위치한 법무법인 태종의 박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 그가 변호사가 된 계기와 청년 변호사로서 법조인을 꿈꾸는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들어봤다.   -법조인의 길을 선택한 계기는. “초등학교 때부터 변호사를 꿈꿨다. 당시에는 명확하고 논리적인 법조인 이미지를 동경한 것 같다. 부산대 법학과에 진학하면서 변호사가 되려고 구체적으로 노력했다. 대학 때 소설 ‘앵무새 죽이기’를 보게 됐다. 성폭행 누명을 쓴 흑인 청년을 백인 변호사가 변호하는 내용이었다. 1930년대 미국 대공황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인종과 계층 간 대립이 심할 때여서 백인이 흑인을 변호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변호인은 온갖 음해에 시달린다. 변호인의 신념과 용기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저런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법조인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1~2년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마침 그 무렵 로스쿨이 생겼다. 입학시험인 법학적성시험(LEET)을 거쳐 부산대 로스쿨에 진학했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로스쿨에서의 경험을 전한다면. “기억에 남는 일은 크게 재학 중 떠난 해외연수와 오케스트라 활동 등 두 가지다. 각각은 문화적 다양성과 인적 네트워크의 소중함을 알게 한 경험이었다. 먼저 로스쿨 2학년 때 해외연수 프로그램으로 미국 캔자스대학교 로스쿨에 2주간 다녀왔다. 8명 내외의 학우들과 함께였다. 교재 등 텍스트(text)가 있었기에 언어적인 어려움은 크지 않았다. 다양한 국가에서 온 학생들과 교류하며 파티문화 등을 경험 할 수 있었다. 국가와 문화적 다양성을 이해하게 됐다. 또 부산대 로스쿨에는 ‘프로뮤지카(In dubio pro musica)’라는 오케스트라 동아리가 있다. 초등학생 때부터 바이올린 연주를 했기에 참여할 수 있었다. 프로뮤지카를 통해 선후배들과 교류하고 졸업 후에도 부산변호사회 오케스트라 ‘바코(BACO, Busan Attorney Chamber Orchestra)’ 활동으로 연주와 인적 네트워킹을 이어가고 있다.”   -로스쿨 후배들을 자주 만나는지. “프로뮤지카가 인연이 돼 꾸준히 공연을 하고 있다. 올해는 이달 초 바코와 합동공연을 벌였다. 후배들은 우리 때보다 다양한 활동을 하기 힘든 상황인 것 같다. 해마다 변호사 시험 응시인원이 늘며 합격의 문이 더 좁아지는 탓이다. 학업 스트레스, 변호사 시험 통과에 대한 중압감 등이 더 커졌다. 이번 공연 뒷풀이 자리에서도 후배들을 만났다. 후배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졸업 후 진로에 대한 것이다. 최근에는 변호사들의 진로가 사내 변호사와 송무(訟務, 소송업무) 변호사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후배들에게 각자의 장단점과 역할이 다르다고 설명한다. 사내 변호사는 월급과 정년의 측면에서 안정적이다. 요즘은 정규직으로 뽑는 추세다. 의뢰인을 대하는 스트레스도 적다. 반면 변호사를 둘 정도면 큰 조직이다 보니 자율적인 면은 다소 떨어진다. 송무에 꿈이 있고 적극적인 성격이라면 송무 변호사가 맞을 것이다. 판사를 설득하는 일련의 과정, 결과에 대해 스스로가 갖는 책임 등 업무 난이도는 큰 편이다.”   -후배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고 싶은지. “변호사 시험의 문턱이 차츰 높아지며 로스쿨 생활이 공부 위주로 치열하게 흘러간다. 굳이 변호사 시험이 아니라도 학업성적이 판‧검사 임용, 로펌 입사 등에도 영향을 미친다.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의미다. 여유가 더 없어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적 네트워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후배들에게 학업도 중요하지만 서로 자주 연락하고 함께 활동하라고 조언하는 편이다. 돌이켜보면 학창시절 프로뮤지카와 인연을 맺은 것이 바코로 이어졌고, 많은 선후배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변호사로서 성장하고 있다. 바코에서 활동하는 주요 멤버만 해도 13~14명이다. 어려울 때 그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변시 합격 후 사내변호사 경험도 했는데. “합격하고 실무수습을 거쳐 한 은행에서 2년 정도 근무했다. 회사마다 업무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사내 변호사 업무를 하나로 규정하긴 어렵다. 경험에 비춰보면 은행에서 일할 때는 대출 관련 소송업무를 담당했다. 소송에서 변론을 하기도 했다. 당시 해당 은행 소속 변호사는 3명이었는데 지금은 더 늘어났다. 변호사가 늘면서 바뀐 사회적 분위기다. 사기업에서도 변호사들을 적극적으로 채용하고 있다. 또 과거엔 법률부서를 따로 만들어 변호사를 채용했다면 지금은 다양한 부서에서 로스쿨 출신들을 채용하고 있다. 전문 변호사로서 역량을 키울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변호사로서 전문분야는 시간이 지나며 해당 분야에 지식과 경험이 쌓일 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해당분야에 대한 실무도 알아야 소송업무에 대한 이해도 빠르다.”   -변호사로서 기억에 남는 소송은. “첫 무죄 판결 사건이다. 주로 형사사건을 하는데, 초년시절 국선변호인으로서 경험을 잊을 수 없다.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부당해고를 시정하라는 집회를 하며 발생한 소음  탓에 업무방해로 기소됐다. 무죄를 입증하려고 다양한 이야기를 수집했다. 그 중 하나가 조합원들은 매일 집회 전 경찰의 소음 측정에 응했고, 스피커 음량의 기준치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는 부분이었다. 다행히 무죄를 선고 받았다. 의뢰인이 받은 첫 무죄판결이었다. 또 이 사건은 집회의 자유와 상인들의 기본권이 충돌하는 일이었다. 기본적인 인권의 옹호자로서 변호사의 역할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앞으로도 특별한 무언가를 이루기보다 절실한 사람들을 돕고 싶다. 의뢰인과 사건들을 매순간 최선을 다해 마주하려 한다.”
    • 살롱
    2019-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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