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7-27(목요일)


머리카락, 그리고 혐오의 미학… 이진선 작가의 작품세계

신체 일부일 때와 아닐 때, 머리카락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청년작가가 대중에게 던지는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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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7.10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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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grotesque). ‘괴기한 것’, ‘극도의 부자연스러움’ 등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그로테스코(grotesco)에서 유래된 단어다. 미국 서부지역의 회전초 마냥 거실과 안방을 구르는 머리카락 뭉치가 그럴 진데, 화장실 배수구에 물기를 머금고 널브러진 머리카락은 ‘그로테스크하다’는 생각을 넘어 뱃속에 간질간질한 무언가를 느끼게 한다.


정치섭 기자 btip@mbusan.co.kr


이진선 작가 (1).JPG

이진선 작가


이진선(26) 작가는 이 같은 우리들의 생각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이를 위해 머리카락을 활용해 설치미술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일종의 경계라고 생각해요. 몸에 있는 머리카락은 한 올 한 올 소중하고 사람의 개성을 드러내는 도구로 여기지만, 몸에서 떨어져 나온 순간 머리카락은 치워야 할 것, 더러운 것이라고 느끼잖아요.” 이 작가의 말이다.
이 작가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평온한 대학생활의 어느 날, 그는 교수의 한마디 말에 충격을 받았다.


“이건 잘 그리기만 했네.”

 

이 작가는 “그 전까지는 똑같이 그린 그림이 잘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교수님의 말을 듣고 난 뒤에는 대상과 닮지 않아도 좋은 그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초상화가 그 인물과 닮지 않았는데, 색이 너무 특이한데, 심지어 못 그린 것도 같은데 묘한 분위기나 느낌을 주는 선배들의 작품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나는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까’하는 이 작가의 고민이 시작됐다.
서양화의 도구는 기본적으로 캔버스와 붓, 물감이다. 하지만 이 작가는 캔버스를 답답하다고 느꼈다. 물감의 색도 표현하기에 충분치 않았고, 붓마저 자신의 의도를 굴절시킨다고 생각했다. 캔버스, 물감, 붓 없이 작업을 시작하며 서양화의 기본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캔버스 대신 종이박스를 주워서 뭔가를 만들고, 유리에 그림을 그리고 붓 대신 손에 물감을 묻혀 그림을 그렸다. 물감을 대신할 다른 소재, 즉 오브제(object)를 찾아 나섰다. 프랑스어인 오브제는 초현실주의 미술에서 사용하는 작품 재료로, 생활용품 등을 본래의 용도에서 분리해 작품에 쓰는 물체다. 돌, 나뭇조각, 차바퀴, 머리카락 등이 있다.
그 무렵 이 작가는 아르바이트로 베이비시터를 하고 있었다. 청소 중 방바닥에 머리카락 한 개를 발견했다. 길었다. ‘이 거 내 건데? 아기 게 아닌데’하고 생각했다. 이름이 적혀있지도 않은데 머리카락 하나로 자신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이 자신을 대변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바닥을 봤다. 함께 사는 자매들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곱슬인지, 염색을 했는지, 길이는 얼마인 지에 따라 누구 것인지 알 수 있는, 머리카락은 일종의 자화상이었다. 그 때부터 머리카락이라는 오브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대학생 때 첫 전시 기회를 만났다. 학생으로 이례적인 기회였다. 일반적으로 대학생 청년 예술인들은 졸업작품전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때문이다. 2017년 스페이스 만덕에서 다른 청년작가 6명과 함께 작품전을 열었고, 이듬해 10월엔 아트쇼부산의 최대 국제아트페어 ‘아트부산’ 의 신진작가 공모전에 참여해 개인전 기회를 얻었다. 150여명이 지원해 1, 2차 심사를 거쳐 4명이 꼽혔다. 불과 2년여만에 그는 화려한 필모를 갖게 됐다. 2차례 개인전시회를 열었고, 13차례 단체전에 참여했다. Young artists전 최우수상(2018) 등 수상도 다수. 지금까지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해온 그가 오늘의청년에 세 작품을 소개했다.

 

아카이브, 2014~현재, 머리카락, 가변설치.jpg

 <아카이브(이진선, 2014~)> 가변설치, 머리카락


‘머리카락 아카이브(2019)’는 최근 작품이다. 지난해 독일 함부르크까지 날아가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받아왔다. 실은 함부르크의 공원에서 독일인의 머리카락을 잘라주며, 오브제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여러 제약 탓에 받아서 모아온 것이다. 비닐봉투에 담은 것을 그대로 전시하기도 하고, 그 사람의 이미지를 투영해서 작품으로 만들기도 한다. “곱슬, 염색, 길이 등 다양한 특성이 담긴 머리카락을 보면 그 시점의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이 작가는 설명했다.


광활함, 그 불안함에 관하여, 2019, 머리카락 외 혼합매체, 가변설치.jpg

<광활함, 그 불안함에 관하여(이진선, 2019)> 가변설치, 머리카락 외 혼합매체


‘광활함, 그 불안함에 관하여’는 오는 8월 30일까지 부산진구 전포동 서면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이 작가의 작품이다. 독일과 서울, 부산을 오가며 한 작품 활동이 자유로워 보일 수 있지만, 스스로는 망망대해 속에서 불안함을 느꼈다. 광활함 속에서 ‘언제 먹이를 먹을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같은 의미를 따라 작품은 바다 속 물고기를 표현했다. 작품 옆에는 어항을 두고 관객이 먹이를 줄 수 있게 했다. 바다에 있는 물고기는 먹이가 풍부한 어항을, 어항 속 물고기는 자유로운 바다를 꿈꿀 것이다.


거부 혐오 그리고 매혹의 교란, 2017, 가변설치, 머리카락 먼지외 혼합매체.jpg

<거부 혐오 그리고 매혹의 교란(이진선, 2017)> 가변설치, 머리카락 먼지외 혼합매체


마지막은 ‘거부, 혐오, 매혹의 교란’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가는 남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하찮은 것에 관심과 의미를 부여했다. 머리카락과 먼지가 그 중 하나다. 작가는 청소기로 청소를 하면 필터에 모이는 먼지와 머리카락조차 자신의 흔적이라고 말한다. 이를 모아 넓은 면을 만들고, 안쪽에서 조명을 밝혀 묘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작품에 대해 이 작가는 “처음엔 거부감이 들다가 혐오감이 들 텐데, 이를 넘어서면 매혹되는 상황이 온다고 생각한다”며 “작품을 통해 거부와 혐오와 매혹의 감정이 교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진선 작가 (3).JPG

이진선 작가


설치미술가로서 이 작가는 공간을 활용한다. 작품은 공간 속에서 기능하고, 공간은 작품을 살아 숨 쉬게 한다. 또 다른 작가들에게 공간은 전시를 위해 필수적이다. 이 작가도 지난 2018년엔 대구문화재단의 가창 창작스튜디오에, 올해엔 부산문화재단의 또따또가에 입주작가로 있다. 그는 현재 부산 사상구 감전동에 ‘루스커피’를 준비 중이다. 작가들이 활용할 수 있는 전시공간인 동시에 관람객들이 커피를 마시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528㎡(160평) 크기의 제법 큰 공간이다. 6월 8일 오픈했다. 루스는 도시 속 정원을 의미하는 라틴어다. 이 작가는 이 공간을 살롱이라고 부른다. 다양한 예술가들이 모여 작품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기획하고 있다.

이 작가는 청년 예술인들의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도 꺼냈다. 그는 자신도 한 때 아무도 몰래 자격증을 취득하려 공부했을 때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문득 ‘부자가 되면 뭘 하고 싶지’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작품 활동을 마음껏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작가는 꿈에 집중하며 살고 있다. 그는 “꿈을 향해 달려갈수록 좋은 기회들이 빨리 찾아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청년들에게 “때론 돌아가도 괜찮다”며 “어떤 꿈이라도, 진정 원하는 꿈을 꾸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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