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19-10-18(목요일)


[이사람] 김미애 변호사

"소외계층, 약자의 어머니가 되겠습니다"

여공(女工), 변호사, 자유한국당 해운대을 당협위원장 이력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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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8.06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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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섭 기자 btip@mbus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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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한올’의 대표변호사인 김미애 변호사는 자녀가 셋이다. 병환으로 하늘로 간 작은 언니의 아들, 형부의 장례 후 힘들어 하는 큰 언니를 위해 키우기 시작한 딸, 그리고 입양한 딸이다. 김 변호사까지 넷은 일본, 필리핀, 베트남, 괌, 사이판, 프랑스 등 다양한 나라를 여행했다. 아이들의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김 변호사는 “아이들이 내색은 하지 않지만 혹시라도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까 걱정했다”며 “다양한 경험, 그 속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며 자연스레 단단해지길 바랐다”고 말했다. 오랜 여행 덕에 두 딸과 아들은 누구보다 넓은 마음을 가졌고 감수성도 풍부하다.

어느 날 입양한 딸이 김 변호사에게 말했다. 친구들이 아빠가 없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딸에게 “우리처럼 한 부모 가정도 있다”며 “다름은 틀리거나 나쁜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봐주고 배려하며 함께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수년 째 반복된 질문과 대답에 딸은 당당히 아이들에게 자신을 소개한다고 했다.

김 변호사는 “어른들이 문제”라고 꼭 집어 말했다. 그는 “학부모들끼리 뒤에서 아이의 가정에 대해 말하는 건 옳지 않다"며 "아이들이 다양함 속에 섞여야 자라서 자연스레 다양함을 인정할 수 있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변호사는 10여년간 많은 나라의 어린이들을 도와왔다. 월드비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한국컴패션 등을 통해 월 약 100만원씩 꾸준히 후원했다. 김 변호사는 "시간이 지나 독립한 아이들의 소식을 들을 때만큼 뿌듯한 일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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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연속이던 유년시절 

김 변호사가 이렇듯 아이들을 돕는 이유는 그의 어린 시절과 관련 깊다. 그는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의 전체 50가구 정도가 사는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 마을 앞은 바다, 뒤는 산이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김 변호사는 “행복한 시기였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김 변호사가 초등학생 때 어머니가 심하게 아파서 병원으로 향했다. 암 말기였다. 병원에서는 항암치료도 어렵다고 했다. 모친은 걸어서 병원으로 갔다가 누워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어린 김 변호사는 학교에서 돌아와 문밖에서 어머니가 ‘아야, 아야’하는 소리를 들은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런 날은 어머니를 리어카 뒷자리에 눕혀 직접 리어카를 끌고 교회로 향했다. 교회 맨 앞자리에 어머니를 눕히고 기도했다. 말기 암 환자였던 엄마는 그렇게 4년을 더 살았다.

중 2때 어머니가 떠났다. 김 변호사는 기억 속 아버지는 늘 어머니의 산소에서 울었다. 김 변호사는 “아버지는 집안을 돌볼 입장이 아니었다”며 “포항여고에 합격했지만 차비가 없어 학교를 다니기 어려웠다”고 회상했다. 학교에 가려면 집에서 구룡포 읍내까지 걸어서 40분, 포항시로 향하는 버스, 포항시에서 다시 시내버스로 갈아타야 했기 때문이다.

김 변호사는 이 때 받은 상처를 ‘거절의 상처’라고 했다. 차비를 빌리러 동네를 다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거절당하는 횟수는 늘어났다. 마침 학교에서 그를 돕기 위해 공개적으로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고마운 일이었지만 사춘기 예민한 소녀에게 공개 모금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모금이 끝나고 운동장에 학생들이 모두 모인 조회시간에 모금운동을 언급했다. 김 변호사는 자신의 처지를 견딜 수 없어 학교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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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공(女工)에서 변호사로…

그렇게 부산으로 향해 여공(女工)이 됐다. 수백 명의 10대 청소년들과 함께였다. 김 변호사는 “부산 해운대구 반여동의 한 공장에서 3교대로 근무했다”며 “특히 밤 10시부터 다음날 6시까지 근무하는 날이 너무너무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졸았다가는 자칫 롤러에 손이 끼는 큰 사고를 당할 수도 있었다. 김 변호사는 “1년 만에 도망치듯 회사를 나왔다”고 말했다. 혼자서 연산로터리 뒷골목을 배회하던 중 봉제공장이 눈에 띄었다. 그곳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돈을 모았다. 봉제공장, 식당 등을 거쳐 형편은 나아졌지만, 배움에 대한 김 변호사의 갈증은 심해져만 갔다. 김 변호사는 6개월간 대입을 준비해 동아대 법학과(야간)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복도를 지나다 우연히 발견한 학교 게시판의 공고가 그의 삶을 180도 바꿔놓았다. 김 변호사는 “고시반 입실시험 공고였는데, 시험과목에 외국어가 있었다”며 “일본어에 자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20대 초반 돈을 벌기 위해 일본인 관광가이드가 되기 위해 일본어 공부에 전념한 시절이 있었다. 그 일본어가 뒤늦게 쓰여질 줄을 몰랐다. 외국어 시험 성적은 최상위권이었다. 1학년 학부 시험결과도 주‧야간 전공을 통틀어 1등이었다고 한다. 1학년 여름부터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김 변호사는 “일하지 않으면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잘 수도 없는 환경이던 시절도 있었다”며 “그런데 학교에 갔더니 세끼 밥을 주고 기숙사도 제공해줘서 공부만 하면 됐다”고 말했다. 2002년 김 변호사는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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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청소년 후원에 이은 정책 제언 노력

이처럼 녹록치 않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노력한 그의 삶이 주변을 돌아보게 했다. 김 변호사는 사법연수원에서 받은 첫 월급 약 100만원을 월드비전에 보냈다. 변호사가 된 직후 한 여중생이 배고픔 끝에 사망했다는 언론보도를 보고는 곧장 동사무소에 가서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 2명을 소개해달라고 했다. 모교인 동아대에는 지금껏 1억 원가량을 후원해 ‘동아 100년 김미애 장학금’이 조성되기도 했다.

주변을 돕는 일에 대해 김 변호사는 “나도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이어 “큰돈을 받는 것만 도움이라고 할 수 없다”며 “20대에 식당을 하면서 힘들 때마다 다른 상인들이 격려해줬고 스물아홉 살에 입학한 대학에서는 인생의 큰 도움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김 변호사는 올해 1월 자유한국당 부산시당 해운대구을 당협위원장을 맡았다. 김 변호사가 부산에 와서 처음 지낸 곳이 해운대구 반여1동이었고, 반여2동과 재송동에서도 오래 살았다. 김 변호사는 “일대는 옛날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며 “정책이주지는 불이 나면 어떻게 할지 막막한 생각이 들 정도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도시재생 분야 전문가와 일대를 돌아봤고, 정책과 법으로 바꿔야 한다고 느꼈다. 또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만난 비행을 저지른 청소년들이 향하는 소년분류심사원과 소년원의 인권 강화 방안, 입양 활성화 및 출산율 제고를 위해 국가가 보조양육자가 되는 양육 시스템 마련 등 정책 아이디어도 머릿속에 가득하다.

녹록치 않은 삶을 헤쳐 낸 원동력을 묻자, 김 변호사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이 이어졌다. 그는 “잘 죽기 위해서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혹자는 내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 당협위원장을 맡는다는 말을 한다”며 “비록 오해를 받더라도 내 노력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활동이다”고 강조했다. 김 변호사는 “죽는 순간 가장 괜찮은 인간이 되길 바란다”며 “어차피 한번 태어나서 똑같이 죽는다면 좀 제대로 살다가 가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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